집 앞 잔디밭을 오랫동안 방치하다시피 했더니 잔디는 거의 다 죽고 잡풀들만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네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잔디밭을 새로 조성하라는 지적을 받게 되어 땅을 파엎고 잔디씨를 뿌리게 되었다.
잔디씨를 사려고 홈디포에 갔더니 씨앗들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해보지 않은 모르는 일을 하기란 간단한 일이라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잔디씨를 사야 할 지 선택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나름대로 한참을 궁리한 끝에 효소처리가 되어있는 씨앗이 발아가 잘 될 것 같아서 그것을 사다가 뿌렸다.
땅을 파엎고 잔디씨를 뿌린지 5일이 지나니까 싹이 트기 시작했다. 지시 사항대로 씨를 뿌리고 나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물을 뿌려주었다. 싹이 트기 시작하더니 금새 초록색을 띠며 자라나서 보기에도 아주 훌륭한 잔디밭이 되었다. 이웃 사람들이 와서 잔디밭을 보고 일을 아주 잘 했다고 훌륭한 잔디밭이 되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3주쯤 지나서 부터는 물을 주지 않고 내버려두었더니 그렇게 예쁘게 자라던 잔디밭이 여기저기 말라죽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을 뿌려주지 않았다고 해도 그동안 날씨가 그리 가물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일까? 씨앗을 너무 배게 뿌려서 그런 것인지, 지시 사항에 따라서 한 것이지만 아직은 여린 새싹인데 그 위에 비료를 뿌려준 것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씨를 뿌려서 싹이 잘 트고 웬만큼 자라기만 하면 잘 된 것인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잔디 씨들이 싹이 터서 막 자라기 시작했을 때는 참 예뻤었는데 그 다음 양육과 삶이라는 현실에 부딪혔다. 그 가운데 내가 알 수 없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누구나 아기로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더없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아기는 예쁘지 않은 아기가 없다. 아기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맑고 잔잔한 호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에메랄드 하늘 빛과 같다. 더구나 아기 엄마에게 이쁘지 않은 아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런 아기가 그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 앞에 양육 과정과 삶이라는 현실이 있다. 아기를 보고 어른 세계를 보면 마음이 암담해진다. 어떻게 그토록 예쁘고 사랑스럽던 아기가 저렇게 추하고 악한 어른이 되는 것일까?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결론 없는 논쟁이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거듭난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새 생명과 사랑은 얼마난 아름다운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의 감사와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그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죄와 마귀와 육체의 정욕에 종이 된 ‘나’라는 왜곡된 자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거듭난 새싹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 새싹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나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