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 중에서 (1/2)

김 선 태 목사
December 12, 2011
나팔소리

천로역정 중에서 (1/2)

꿈 속에서 보니 그들 두 사람이 계속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믿음이 문득 옆을 바라보다가 그들 옆에서 한참 떨어져 걷고 있는 수다장이를 보게 되었다. 이곳의 길은 상당히 넓어서 그들 모두가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

믿음: 여보시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혹시 천국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수다장이: 예. 그리로 가는 길이올시다.

믿음: 아, 그럼 잘됐군요. 우리 모두 함께 사이좋은 동행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수다장이: 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당신들의 동행이 되겠습니다.

믿음: 그렇다면 이리로 오십시오. 함께 걸어가면서 유익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냅시다.

수다장이: 당신이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 함께 유익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내겐 퍽 반가운 일입니다. 그처럼 선하고 값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군요. 솔직이 말해서 여행 도중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익한 잡담이나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도 가치있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제게는 늘 걱정거리가 되어왔지요.

믿음: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지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보다 이 세상 사람들의 혀와 입을 사용하기에 더 가치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수다장이: 당신이 그렇게 확신이 넘치는 훌륭한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참 기쁘군요. 제가 한 마디 더 거들자면 사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보다 더 유쾌하고 유익한 일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경탄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처럼 유쾌한 일은 정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령 사람이 역사 혹은 신비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기쁨을 찾는다거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 기이한 이야기들, 혹은 징조에 관한 이야기들을 즐겨한다면 성경처럼 재미있고 유익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 옳은 말씀이에요. 우리의 대화 중에 그러한 일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유익을 얻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다장이: 그게 바로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바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으니 매우 유익한 모임에 틀림 없지요. 예를 들면 세상적인 것들이 모두 헛되다든지 하늘에 관한 것들이 우리의 영육에 유익이 된다는 것 등. 물론 이러한 것들은 보편적인 것들이지만 특별히 유익한 것들을 말하자면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필요성, 인간이 하는 일의 불충분성,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인간의 구원에 필요하다는 점 등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눔으로써 회개하는 것, 믿음을 갖는 것, 기도하는 것, 고통받는 것 등등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배우게 되며, 복음이 주는 위대한 언약과 위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어 스스로 위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서 사람은 이런 이야기들을 통하여 그릇된 견해들을 물리치고, 진리를 밝혀주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수 있는 능력까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믿음: 모든 것들이 다 옳은 말씀이니 당신으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수다장이: 아!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영혼에 은총이 작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는 율법에 의지해 살고 있는데, 이처럼 율법에만 의지해 사는 사람은 결코 천국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 잠깐 실례합니다만 그와 같은 하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 자체의 근면한 노력과 단순한 이야기만으로는 성스러운 하늘의 지식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다장이: 그것은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인간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요(요3:27). 모든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 행위로 되지는 않습니다(딤후1:9).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백 개의 성경구절이라도 인용하여 당신께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 그렇다면 이제 뭔가 한 가지 주제를 정해놓고 그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수다장이: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택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기만 하다면 하늘에 관한 이야기나 세상에 대한 이야기, 혹은 도덕에 관한 이야기, 복음에 대한 이야기, 거룩한 것, 세속적인 것, 과거에 대한 것, 미래에 대한 것, 외국에 대한 것, 우리나라에 대한 것, 본질적이거나 혹은 부수적인 것 등등 무엇에 대한 것이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제 믿음은 수다장이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크리스챤 쪽으로 다가가(이제껏 크리스챤은 혼자서 말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용감하고 훌륭한 동행자가 생겼오! 틀림없이 이 사람은 매우 뛰어난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 (이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당신이 지금 그토록 감탄하고 있는 사람은 스무겹이나 되는 혀를 가지고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속여넘길 것입니다.

믿음: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알고 있습니까?

크리스챤: 알다 뿐이겠오! 그 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게요.

믿음: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크리스챤: 그의 이름은 수다장이인데 우리 동네에 살던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를 모르고 있다니 좀 이상한데, 아마도 우리 동네가 크기 때문인가 봅니다.

믿음: 그는 누구의 자식이며 우리 도시의 어디쯤에 살고 있습니까?

크리스챤: 그는 달변의 아들인데 ‘말 많은 동네’에 살고 있으며 ‘말 많은 동네’의 수다장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지요. 말 재주는 참 좋지만 알고보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요.

믿음: 글쎄요. 내게는 꽤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던데요.

크리스챤: 그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요. 멀리서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추잡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가 퍽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았을 때 멀리서 볼 때는 아주 멋진 그림으로 보이더니 가까이 가서 보니까 점점 형편없는 그림으로 보이더군요.

믿음: 당신이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아마 농담을 하고 계시는가 봅니다.

크리스챤: 천만의 말씀입니다.비록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 농담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근거없이 남을 비방한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사람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알려드리리다. 지금 당신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이 그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이든지 붙들어 놓고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지 이것저것 마구 지껄여대는 사람입니다. 술좌석에 앉아서도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술이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더 이야기가 많아지지요. 종교라는 것은 사실상 그의 마음 안에도, 집에도, 대화 중에도, 일상 생활 가운데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혀끝으로만 이야기할 따름이며 그의 종교관은 결국 횡설수설 떠벌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단단히 속았군요.

그리스챤: 속았지요! 틀림없이 속으신 것입니다.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도다(마23:3)’라는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는 말씀도 잘 새겨두세요. 그 사람은 기도와 회개, 신앙과 거듭남 등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말로만 그칠 뿐입니다.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고 고향에서나 타향에서나 그를 주욱 관찰해 왔으므로 그에 대해서 내가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그의 가정은 계란 흰자위가 맛이 없듯이 종교의 참 맛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그의 집에서는 기도나 회개의 징조가 도무지 보이지 않으며 차라리 그의 짐승들이 그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어디를 가나 그를 좋게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고 그로 인하여 종교 자체도 비난을 받고 있지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타향에서는 성자요, 고향에서는 악마’라고 한답니다. 그의 불쌍한 하인들이나 가족들이 표리가 다른 그의 언행으로 인하여 고초를 겪고 있는데, 지독한 구두쇠인데다가 욕을 마구 퍼부으면서 너무나 하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 혹은 어떻게 말해야할 지 몰라서 늘 당황하고 있답니다. 저 사람과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그와 거래하기 보다는 차라리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터어키 사람들과 거래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말한답니다. 오히려 터어키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더 공정한 거래가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저 수다장이는 가능하기만 하면 남들 위에 올라서서 부정하게 속이고 횡령하기가 일쑤이고 협잡으로 그들을 압도하여 괴롭히기도 한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조차도 자신의 행적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있는데 만일 자식들 중 어느 하나라도 약한 담력을 소유한 바보라고 판단되면(온유하고 선량한 양심의 소유자를 그는 바보스런 약자라고 부르는 거지요), 바보니 멍청하니 하고 모욕을 주면서 결코 그들에게 일을 맡기지도 않고 남 앞에서 칭찬해주는 일도 절대로 없답니다. 나로서는 만일 내 의견을 솔직이 말한다면 그의 추악한 일상 생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거꾸러지고 구렁텅이에 빠졌으며 만일 하나님께서 막지 아니하시면 더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믿음: 아! 형제여,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은 크리스챤다운 양심으로 사람들을 정직하게 평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사실상 당신이 말한 그대로일 거라고 믿습니다.

크리스챤: 나도 당신처럼 그를 잘 알지 못했더라면 처음에 당신이 그에게 경탄했듯이 아마 나도 그의 본색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종교를 배척하는 무리들의 입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그것을 악의에 찬 비방으로 여겼을 테지요. 악한 사람들의 입에서 선한 사람들의 명성이나 기업을 흑평하는 일이 흔히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직접 알고 있는 이러한 모든 악한 행위들만 가지고도 그가 얼마나 사악한 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은 그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어 형제나 혹은 친구라고 부르지도 않는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얼굴을 붉히며 수치로 여기고 있지요.

믿음: 아, 이제 말과 실제 행동은 별개의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구별을 좀더 명확히 할 수 있도록 한층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크리스챤: 참으로 말과 행동은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르듯이 별개의 것들이지요. 영혼이 없는 육신은 죽은 시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도 역시 죽어있는 시체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종교의 정신은 곧 실행하는 데에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22-26)’라고 성경에 쓰여 있지요. 그러나 수다장이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진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는 셈이지요. 듣는 것은 단지 씨를 뿌리는 작업에 불과하고, 말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생활 속에 실제로 참된 열매가 열렸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날이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제각기 그들이 거둔 열매의 성과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날에 이르러 심판자께서는 ‘너는 믿었느냐?’하고 묻지 아니하시고 ‘너는 진실로 행했느냐? 혹은 말만 하고 다녔느냐?’하고 물으실 것이며 그 행함의 여부에 따라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세상 최후의 날은 추수하는 날로 비유될 수 있으니 당신도 알다시피 추수할 때 농부가 관심을 두는 것은 열매 이외에는 없습니다. 믿음에 의하지 아니한 것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심판 날에 이르러 저 수다장이의 허황한 거짓말이 얼마나 쓸모없는 헛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 이러한 비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 : 당신의 말씀을 들으니 모세가 깨끗한 짐승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깨끗한 짐승이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을 일컬음이요, 굽만 갈라졌거나 새김질만 하는 짐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던 말씀말입니다(레11:36; 신14:7). 토끼는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져 있지 않으므로 깨끗치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수다장이와 너무나 유사한 비유입니다. 그는 세상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말만으로 새김질을 하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죄인의 길에서 떠나지 못하므로 개나 곰의 발처럼 굽이 갈라지지 않는 부정한 놈이라 해야할 것입니다.

크리스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잘은 모르지만 성경 말씀의 참된 뜻을 이해할 것 같은데 저도 한마디 보태지요. 사도 바울은 말만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전13:1-3)’고 하셨고, 다른 부분에서 이 말을 좀더 쉽게 설명하여 ‘생명없는 것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고전14:7)’고 말했지요. 생명이 없는 것들, 즉 진실한 신앙과 복음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혀가 천사의 목소리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지라도 생명의 자손들 틈에 끼어서 천국에서 함께 살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믿음: 그렇지요. 처음부터 저 사람과 동행하는 것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아주 진절머리가 나는 군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요?

크리스챤: 저의 충고를 받아들여 제가 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마음을 돌리게 하지 않는 한 그도 역시 당신과 동행하는데 진절머리를 낼테니까요.

믿음: “자,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크리스챤: “다시 그에게로 가서 종교의 능력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나누자고 제의해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찬성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려 들텐데 그 때 참된 종교의 능력이 그의 마음이나 가정이나 대화 속에 명백히 들어있는 지를 확실하게 물어보세요.”

믿음: (그러자 믿음은 다시 수다장이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오랫동안 실례했습니다. 그래, 지금 기분은 어떻습니까?”

수다장이: “고마워요, 좋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를 계속 했더라면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텐데 중단하게 되어 아쉽습니다.”

믿음: “글쎄, 당신만 원하신다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할 지 화제는 저에게 맡긴다고 하셨으니까 이런 것을 얘기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그 변화가 나타날까요?”

수다장이: “아, 그러면 사물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는 말씀이군요. 아주 좋은 화제를 택하셨습니다. 기꺼이 당신께 대답해 드리지요. 간단하게 요점만 말씀드리자면 우선 하나님의 은총이 가슴에 충만하게 되면 죄에 대한 반발의 소리가 크게 일어날 것이고, 둘째로 —-.”

믿음: “아니, 잠깐만, 우선 한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제 생각에는 죄에 대한 반발의 소리라기 보다는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혐오하게끔 만들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수다장이: “아니, 죄에 반발하는 소리와 죄를 혐오하는 생각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씀입니까?”

믿음: “아! 큰차이가 있지요. 사람은 단지 전략상 죄를 비난하는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진실로 죄 그 자체를 미워하려면 죄악을 대적하는 경건한 반감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단 위에서는 죄를 비난하여 크게 외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이나 가정에서나 행동에서는 그 발언대로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번 보았지요. 요셉의 주인 마누라는 마치 자신이 정숙하고 경건한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지만 기꺼이 요셉과 더불어 부정한 짓을 행하려 들었습니다(창 39:15). 마치 어떤 어머니가 무릎에 앉힌 아이를 향해 못된 아이니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막 비난하다가도 어느 새 아이를 껴앉고 입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수다장이: “내가 보기에 당신은 억지로 남의 흠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군요.”

믿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단지 현상을 옳게 판단하고자 할 뿐입니다. 자 그럼, 마음 속에 나타나는 은혜의 작용의 두번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다장이: “복음의 신비에 대한 많은 지식의 획득이지요.”

믿음: “그것이 은혜가 나타나는 첫번째 표지가 되었어야 할텐데, 그러나 첫째 표지이건 마지막 표지이건 그것 역시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신비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지식을 획득한다 할지라도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영혼에 적용하는 은총의 혜택이 될 수 없으니까요. 사람이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결국 허무한 존재이고 결과적으로 지식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이 모든 것을 아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시길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요 13:12, 17). 즉 예수께서는 진리를 아는 데에 축복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축복을 두셨습니다. ‘주인의 뜻은 알면서도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종’ (눅 12:47)이 있듯이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된 크리스챤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당신이 말씀하시는 표지는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안다는 것은 얘기 좋아하고 허풍떨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뿐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아는 대로 행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된 지식이 없는 마음도 얼마든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식이 없는 마음은 공허하기 때문에 지식은 물론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색으로만 만족하는 지식도 있고 신앙 및 사랑의 은총과 함께 동반하는 지식도 있지요. 전자는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과시하는 지식이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진실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후자의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진심으로 지키리이다.’ (시 119:34)”

수다장이: “당신은 또 다시 내 흠만 잡으려 드는구려. 그런 말은 덕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 “그럼, 만일 좋으시다면 은총의 작용이 나타나는 표지를 또 하나 말씀해 주십시요.”

수다장이: “아니, 그만두겠습니다. 우리 둘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믿음: “만일 당신이 말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제가 의견을 제시해도 괜찮겠습니까?”

수다장이: “당신 좋을 대로 하시구려.”

믿음: “마음 속에 은혜의 작용이 나타나는 사람은 그 자신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요. 은총을 친히 소유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즉, 은혜의 작용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의식을 절실히 깨닫게 되고 특히 본성의 타락함과 불신앙의 죄를 인식하게 되지요. 즉 은혜의 덕택으로 그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비를 얻지 못하면 그는 정죄받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요 16:8,9; 롬 7:24; 막16:16)

이와같은 방향으로 사물을 보고 느낌으로써 그는 죄에 대한 슬픔과 부끄러움을 인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께서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나사 평생동안 그가 구주 가까이 살아가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목마름과 갈급함으로 추구하고 또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 38:18; 렘 31;19; 갈 2:16; 행 4:12; 마 5:6; 게 21:6)

이처럼 구주를 믿는 믿음의 강하고 약한 정도에 따라 그의 기쁨과 평화, 경건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 구주를 좀더 알고자하는 소망의 정도가 좌우되며 이 세상에서 주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열성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은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기는 하면서도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곧 은총에 의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인식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부패된 상황 속에 처해 있고 이성의 잘못된 남용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가 은총에 의한 것임을 확고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건전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체험적으로 고백함으로써(롬 10:10; 빌 1:27).
  2. 그러한 고백에 실제로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 즉 경건한 생활, 경건한 마음, 경건한 가정 (만일 그가 가정을 가지고 있다면), 경건한 일상 생활의 대화 등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경건하고 깨끗하게 하면 대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미워하게 되며, 가정 내에서도 이러한 죄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암암리에 죄를 멀리하게 되고 마침내 온 세상에 경건함을 증진시키되 위선자나 지껄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단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능력에 의지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요 14:15; 시 50:23; 겔 20:43; 마 5:8; 롬 10:9, 10; 빌 3:17, 20)

자, 선생님, 제가 금방 은혜의 작용과 그 나타나는 효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 혹시 이의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만일 이의가 없으시다면 당신께 두번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만.”

수다장이: “아니, 지금 난 반대할 입장이 아니라 단지 듣기만 하는 입장에 처해 있으니 어서 두번째 질문이나 해보시구려.”

믿음: “두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은혜의 작용에 대해 내 설명 중에 첫번째 것을 당신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당신의 종교는 행위와 진실 안에 서있기 보다는 말과 혀 끝에만 존재하지는 않습니까? 제발 이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내게 대답하시고자 할 때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아멘하고 인정해 주시리라 믿는 것만 말해 주시고, 당신의 양심이 안에서 당신을 시인하는 것 이외에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상 생활이나 이웃들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증명해주는데 당신 혼자서만 이렇다 저렇다 장황하게 떠벌리는 것도 크나큰 죄악임을 명심해주십시오.”

수다장이: (이 말을 듣고 처음에 얼굴을 붉혔던 수다장이는 곧 마음을 다시 강퍅하게 고쳐먹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믿음씨, 당신은 지금 경혐이니 양심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당신이 한 말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군요. 나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고, 당신이 말한 그따위 질문들에 대해서 지금 대답할 기분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교리문답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내가 당신 질문에 꼭 대답해야할 의무도 없고 설사 당신이 교리문답자인양 으시댄다 하더라도 당신이 내 심판관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바입니다. 당신이 어째서 그런 질문을 내게 하는지 그 이유를 좀 말해 주시겠소?”

믿음: “내 눈에 당신이 말하기만을 앞세우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당신이 일반 상식 이외에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오. 그뿐만 아니라 솔직이 말씀드린다면 당신의 종교는 단지 혀끝에서만 맴돌 뿐이고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크리스챤들 가운데 하나의 오점으로서 당신의 경건치 못한 행동으로 인하여 종교가 더 나쁜 인식을 받게 되고, 당신의 사악한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이 벌써 여럿이며 앞으로도 그로 인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종교는 술집과 탐욕과 부정한 짓과 헛된 맹세와 거짓말과 잡담 등 온갖 좋지 않은 것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습니다.한 명의 창녀가 여성들 전체에게 수치가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당신은 모든 성도들의 수치가 된다는 평판이더군요.”

수다장이: “당신은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처럼 성급하게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미루어 나와 함께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군요. 자, 그러니 이만 헤어집시다. 잘 가시구려.”

그 때 크리스챤은 믿음에게로 다가와서 말을 꺼냈다.

크리스챤: “그 사람과의 대화가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내가 말했지 않소. 당신의 말과 그자의 정욕이 서로 어울려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신과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떠나버렸군요. 내가 이미 말했듯이 그는 떠나버렸으니 그냥 가게 내버려 두십시다.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그사람 자신이니까.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는 한 아마도 그는 계속 이야기를 하려 들었을텐데 스스로 떠나가버렸으니 우리는 괴로움을 면하게 된 셈입니다. 그와 계속 동행했더라면 단지 오점만 남겨주었을 겁니다. 또한 사도도 말하기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3:5)’고 하였지요.”

믿음: “하지만 저는 그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을 그가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여하튼 저는 그 사람에게 명백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니까 설사 그 자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제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크리스챤: “그처럼 명백하게 그의 잘못된 종교관을 지적하고 참된 진리를 말씀해주신 일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 요즘에는 당신처럼 성실하게 신의로써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에 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게 되는 거지요. 즉 말하기 좋아하는 바보들이 말로만 종교를 믿으면서 경건한 신자들 사이로 돌아다니며 타락하고 허영에 찬 말들을 지껄임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고 기독교를 더럽히며 신실한 자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을 다룰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명백하고 신실하게 다루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면 말보다는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게 되거나 아니면 경건한 성도들과 사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떠나버리거나 양자 택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믿음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처음엔 날개를 펼쳐 올리며 득의양양하던 수다장이!

얼마나 용감하게 말을 했던가!

모든 사람들을 그의 능변 앞에 굴복시킬 듯이 도도하던 수다장이!

믿음이 흉금을 터놓고 진실을 이야기하자

둥근 달이 이지러지듯 그의 기세도 기울어 결국은 떠나버렸네.

누구에게나 흉금 터 놓고 진실을 이야기 할 때 다 그처럼 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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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김 선 태 목사

Writer at Carme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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