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는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놓여 있던 가정과 결부된다. 이러한 가정의 이미지는 성경의 히브리서 11장 16절에 나오는 ‘본향’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더욱 본질적인 심리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가정은 내가 언제든지 돌아갈 유일한 안식처이며 보금자리였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서 들로 산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놀다가 해거름이 되어 송아지를 찾는 엄마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순간 가슴 밑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현기증에 몸을 떨기도 했다. 멀리 동네 뒷 산 꼭대기에 한 뼘 남은 노을이 슬프도록 아름다웠고, 동네 어귀로 밀려드는 앞 산의 검은 그림자가 무서웠다. 갑자기 친구들은 각기 제 집으로 뛰어가는데 잠시 얼어붙은 듯 홀로 남겨진 순간의 쓸쓸함은 가슴 깊은 곳에 흔적으로 쌓였다. 퍼뜩 제 정신에 놀라 집으로 달려가면 걱정스럽게 기다려주던 엄마의 얼굴에서 더 없는 안도감을 맛보곤 하였다.
저녁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면 낮에 함께 놀던 친구들의 얼굴이나 집 밖의 그 모든 것들이 현실감 없이 가물거렸다. 가정과 그 외의 세계는 분명 다른 테두리였다. 가정은 나의 삶의 중요한 요소들을 공급해주고 채워주는 근원이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 심리적 안식처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의 실존의 근원이며 출발점이 바로 가정이었다. 언제나 가정을 떠나 가정 외의 세계로 나가지만 또한 언제든지 회귀할 수 있는 곳이 가정이었다. 세상 속에 있는 동안이라도 늘 세상 속의 나를 있게 하는 근원이 가정이었다. 그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 나의 실존의 요소들을 공급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나의 실존의 영원한 본향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나는 실존 자체의 한계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간간이 쌓여오던 쓸쓸함이나 외로움, 단절감 같은 감정들의 실체인 양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다가왔다. 이제는 가정이 더 이상 이 문제의 해결이나 안식을 안겨주지 못하였다. 초등학교 어느 때 부터인지 나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경우 이십 여 호 남짓한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뒤 꽤 높은 산 봉우리로부터 흘러내린 산자락은 그 작은 우리 마을을 보듬어 안을듯이 양팔을 벌려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다. 마을 앞 양쪽 산자락 끝을 벗어날 지경부터 우리 마을 이십여 가구가 생명줄을 댈 만큼의 들판이 펼쳐져 있다. 또 다시 그 들판 앞쪽으로 어린 시절 멱감고 물고기 잡던 맑은 개울이 우리 마을을 외부로부터 경계 짓듯이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다. 온통 어린 시절 꿈이 자라고 서려있는 마을이지만, 한편 뜻 모를 인생의 고뇌와 아픔이 싹트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의 해묵은 감나무 꼭대기에 알몸으로 남아 있던 홍시 몇 개마저 배고픈 산 까치들의 먹이로 다 없어지고, 마을 앞 들판의 가을걷이도 집집마다의 곳간으로 옮겨진지도 오래고, 빈 들판에는 찬 바람만 울리던 초겨울이었다. 울긋불긋 길게 늘어뜨린 만장 기폭을 앞세우고 계절의 색깔과는 대조적으로 이질적인 원색으로 치장한 상여가 마을 어귀를 돌아나가고 있었다. 꿈 속에서 들려오는 듯이 구체성 없는 호곡 소리는 빈 들판으로 찬바람에 시린 허공중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날 밤, 그 긴 밤을 뜬 눈으로 시커먼 천정을 응시하며 지새웠던가. 죽음의 문제, 삶은 무엇인가? 원초적 쓸쓸함과 허무가 가슴 속에 병이 되어 갔다. 실존의 유한성, 단절, 익숙한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아니하고는 삶의 모든 행위가 ,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허무로 무의미로 귀착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까지 나의 실존의 근원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줄 알았던 가정 안에도 죽음의 그림자는 드리워 있었고, 실존의 유한성, 친숙한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이 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주변에 사물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휘저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두움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내가 서있는 저만큼 앞쪽의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점차로 맹렬해지면서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면 나는 죽는다는 전율이 온 몸을 휩싸고 있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서히 그 소용돌이에 빨려가고 있었다. 그 때 위로부터 커다란 손이 내려와 나를 붙잡았다. 내 몸은 이미 소용돌이 바로 앞까지 끌려와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나의 몸을 붙잡은 그 커다란 손만을 볼 수 있었다. 내 몸은 더 이상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를 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던 암흑도 내 앞에서 서서히 멈추고 있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사랑, 안식의 가치들을 깨닫게 되면서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 상황에 직면하여 빠졌던 문제들이나 고통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 아래 놓여 있던 가정의 이미지는 다시금 긍정적인 이미지로 회복되었다. 잠시나마 그 가정 속에서 누렸던 사랑과 안식에 대한 기억과 갈망은 이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미지로 결부되어 나의 심리적, 신앙적 본향의 개념을 형성한다. 실존의 유한성 그 한계를 넘어 나의 존재의 돌아갈 본향이 어릴 적 나의 가정의 이미지와 결부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
김 선 태 목사
August 28, 2011
나팔소리
Summary
나의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는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놓여 있던 가정과 결부된다. 이러한 가정의 이미지는 성경의 히브리서 11장 16절에 나오는 ‘본향’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더욱 본질적인 심리적 이미지를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