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인도에 있는 한 선교부에 어수룩하게 보이는 사람이 슬픈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한동안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던 그 사람의 사연은 듣기에도 참 딱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줄 알고 어찌 도와주어야 할까 생각하며 그 사람의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그의 아들과 함께 바다 속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는 일로 생계를 삼아왔다고 하였다. 그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흡을 멈추고 물속에 들어가 어패류를 채취할 때에는 언제나 욕심을 버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간혹 물속에서 발견한 큰 조개라도 놓치게 되면 다시 물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그놈을 다시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 날도 날은 맑고 물은 따뜻해 잠수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한 번의 물질이 끝난 후 잠시 쉬고 두 번째 물속에 들어간 아들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물위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급히 아들의 물망태를 잡고 줄을 끌어올리니 아들은 이미 죽은 채로 그 줄에 끌려올라왔다. 그런데 죽은 아들의 손에는 자신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흑진주 조개가 꽉 쥐어져 있었다. 아들은 그 커다란 흑진주 조개를 발견하고는 아마도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아들은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했고 흑진주를 얻었지만 대신 생명을 잃었다. 그들의 생계를 이어주던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차마 그 진주를 팔아 삶에 유익을 얻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가끔씩 오가며 삶에 위안을 삼던 선교부에 그 흑진주를 가져온 것이었다.
성경에는 욕심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한 사람들이 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의 법을 깨뜨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분수를 넘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에 붙잡혀 사망의 길로 갔다. 이러한 아담의 죄악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늪에 빠뜨렸다. 다윗도 가장 성공한 자리에서 욕심과 교만에 사로잡혀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되어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악을 저질렀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생명을 담보로 돌이킬 수 없는 악을 행했다.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야할 제물을 취했다가 그 온 가문이 멸망받는 비극을 초래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저런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경에서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고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욕심은 죄의 씨앗이며 마귀의 통로가 된다. 그러나 이미 죄에 물든 인간이 자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전혀 악하게 보이지 않는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는 거짓과 유혹들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믿음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다. 그 안에는 나의 영원한 생명이 있고 나의 참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 안에는 나의 삶이 있고 나의 영원한 미래가 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은혜는 우리의 부족한 것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채워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기를 원하신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